맘스터치
어제 오전에 병원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가라앉은 상태에서 맛있는 거 먹게 집에 오라는 엄마의 문자를 읽고 눈물이 났기 때문이다. 일단 눈물이 나면 부정적인 생각이 더 쉽게 떠오른다. 그래서 툭 건들기만 해도 울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이대로 집에 갔다간 부모님 앞에서 울 것 같아서 약 처방을 받으려고 급하게 병원 예약을 잡았다.
서둘러 가느라 좀 뛰었더니 땀이 났다. 도착해서는 냉수를 벌컥 벌컥 마셨다. 그렇게 15분 정도 기다리다가 진료실로 들어갔다.
내 얘기를 별로 하고 싶지 않아서 의사선생님의 어떻게 지냈냐는 물음에 ‘비슷했어요. 그런데 약을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이명이 너무 심해요.’라고 대답했다. 새로운 약을 쓰고 싶냐 아니면 예전 병원에서 먹었던 약을 다시 쓸거냐는 물음에는 예전에 먹어본 브린텔릭스를 달라고 했다. 왜냐면 브린텔릭스를 먹으면 눈물이 안 나오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내 경우에 약을 먹은 날 밤부터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슬픈 생각을 해서 눈물이 핑하고 돌아도 그 이상의 단계로 넘어가지 않고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는다. 좀 뻘생각이긴 한데 면접 볼 때 이걸 먹으면 괜찮겠다는 생각도 했다. 압박 면접 같은 거 하면 못버티고 성격상 울 것 같은데 이 약을 복용 중이라면 그 어떤 비수가 날아와도 불쾌하기만 하고 눈물이 안 날 것 같았다. 이 얘기를 친구한테 한 적 있는데 걔는 막상 면접 볼 땐 니 밥줄이 달린거라서 눈물 안 날거라고 시니컬하게 답해줬다.
어쨌든 그렇게 약을 주겠다고 하시더니 다시 어떻게 지냈냐고 물어보셨다. 간략하게만 대답하려고 했는데 말하다보니 길어졌고 결국 눈물이 또 났다. 오전에 울었는데 또 울다니. 눈물샘은 마르지도 않나. 주인은 시들시들한데 혼자만 팔팔해. 그나마 모자 쓰고 가서 다행이었다. 뭐 어쨌든 이 의사샘은 딱히 위로를 많이 해주지도 않고 조언도 하나도 안해주는데 대답 유도를 잘하는 것 같다. 아니면 대답을 유도하는 얼굴인 것 같기도 하다. 선량하게 생겨서 그런가? 하여튼 이 의사샘 앞에만 앉으면 말도 눈물도 줄줄 나온다. 근데 그렇게 말하고 나오면 왠지 허무하다. 아니 개운한건가? 잘 모르겠다. 그냥 이상한 느낌이다.
진료를 받고 약처방을 받아서 일단 배스킨라빈스에 갔다. 가서 더블레귤러로 민트초코랑 이상한 나라의 솜사탕을 먹었다. 약도 바로 같이 먹고 엄마, 아빠 집으로 갔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멍하니 울면 안되는데 하고 생각했다.
집에서는 이것저것 많이 먹고 마지막으로는 장어구이까지 먹었다. 양념을 발라서 구워주셨는데 정성과 그 안에 담긴 사랑을 알지만 썩 맛있지는 않았다 엉엉. 다른 맛있는 걸 이미 많이 먹어서 배부른 상태였던 탓도 있다. 엄마는 우리딸이 장어가 맛이 없나보다 하면서 슬퍼하셨다. 그래서 그런건 아니고 배가 너무 불러서 그렇다고 말씀드렸다. 음 근데 뼈를 같이 먹는 생선을 싫어하는 건 맞다. 입에 씹힐 때 느낌이 별로고 목구멍에 가시가 박힐까봐 찜찜하다. 비슷한 이유로 막회도 안 좋아한다.
돌아가면서 용돈으로 십만원을 받았다. 나 돈 많으니까 안 주셔도 된다고 했는데도 기어코 주셨다. 죄송했다. 다른 사람은 이렇게 용돈을 받으면 미안함을 느끼고 동기부여가 되지 않을까. 그런데 나는 죄책감이 느껴지고 괴롭기만 하다. 동기부여는 되지 않고 달아나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받을 자격 없으니까 안 주셨으면 좋겠는데 안 받겠다고 하면 어른이 주는 거니까 받으라고 하신다. 그러면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서 일단 받는다. 그렇게 받은 돈은 서랍장에 몇 개월을 그냥 넣어둔다. 쓸 생각도 안하다가 돈 간수 좀 제대로 하라는 잔소리를 들으면 슬그머니 통장에 입금한다. 어쩌면 나는 돈이 꼴보기 싫은지도 모르겠다. 정확히는 돈에 담긴 가족들의 기대, 그 기대를 외면하고 싶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항상 한강을 지난다. 버스를 타고 지나는데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한강 야경은 좋다. 좋은데 슬프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늘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넜다. 스마트폰을 보다가도 다리를 건너는 그 순간만큼은 고개를 들어 창 너머로 보이는 불빛들을 봤다. 그 땐 야경을 보며 참 예쁘다고, 저 불빛 중 하나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어제는 야경을 보며 그냥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검은 하늘에 스르륵 스며들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그래도 약을 먹고 부모님 앞에서 안 울었으니 어제는 그걸로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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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답답해서 나가고 싶었다. 가본 적 없는 장소에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버스타고 가다가 목동역에서 내렸다.
한 번도 안 와본 동네에서 한 번도 안 먹어본 맘스터치 버거를 먹기로 했다. 여기 되게 좋은게 써브웨이도 있고 버거킹도 있다. 천국인줄...
버거 먹다보니 수업 끝난 학생들이 많이 오더라. 입시로 유명한 동네인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일요일까지 학원에서 공부하나 보다. 밥 먹으면서 6시 50분까지 들어가야 된다고 지각하면 안된다고 하는게 왠지 풋풋했다.
어쨌든! 맘스터치에선 싸이버거 세트를 먹었다. 처음 한 입 먹고 오? 했다. 근데 먹다보니 그냥 그랬다. 싸이버거를 좋아하시는 분들에 대한 모독이 아니다. 그저 내 입맛이 조금 이상해진 것이다. 요즘은 아무리 먹고 싶었어도 두 입 정도 먹고 나면 맛이 없다. 처음 먹고 오? 했다가 두 입 먹고 아....그냥 그렇네 한다. 옛날엔 맛있는 거 배부르게 먹으면 행복했는데 요즘은 불쾌하기만 하다. 소화능력도 안 좋아서 일주일에 두 번은 소화제를 먹는다.
먹고 싶은 것이 생겨도 바로 먹지는 않는다. 일단 먹으려면 나가야 하는데 집 밖으로 잘 나가지 않으니까. 밖으로 나가려면 온갖 에너지를 끌어모아야 하는데 그게 피곤하다. 그리고 맛있는 걸 먹으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도 있다. 왠지 내가 맛있는 걸 먹을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 같아서다. 매일 매일 소소한 행복을 찾기로 했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걸 보니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다.
약간 우울하게 썼지만 그래도 기분은 평범한 축에 속한다. 약을 먹어서 그런지 왠지 괜찮은 것 같다. 아마도 기분 탓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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